세상에서 가장 짧은 한국사 - 여기 한국사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본다

관리자 | 2018.09.06 13:04 | 공감 0



책소개
오천년의 역사를 배우는 긴 여정에 호기심을 돋우는 책
이 책은 에피타이저와 같다. 오천년의 역사를 배우는 긴 여정에 호기심을 돋우는 에피타이저이길 바란다. 비록 다른 역사서적들에 비해 짧지만 꼭 필요한 정보가 있고, 생각해볼 거리도 있다. 그리고 당신의 관심 거리도 있다. 이 책을 통해 역사책 읽기의 대장정에 도전해보기를 바란다.

출판사 서평
이 책은 에피타이저와 같다.
한국사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전개된 역사로,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되어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한국사는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무엇보다 우리 역사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학이 취업에 집중하다보니 기초학문이 쇠퇴해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역사 교육 역시 점차 축소되어 왔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잘 알고 있어야 할 한국사다. 말로는 역사 교육 강화라고 하지만 역사 교육 시간은 축소되고 있다. 
역사를 안다는 것은,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어렵고 지루한 일이 아니다. 역사는 history,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이다. 한국사는 바로 이 땅 한반도에서 살았던, 우리 조상의 살아온 이야기라고 본다면 흥미를 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구석기시대부터 지금에 이르는 5천년의 역사를 아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인내심을 가져야 할지도 모른다.

책 속으로
보통 두문불출이라 하면 집에 있으면서 결코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 모습을 말한다. 그런데 ‘두문(杜門)’은 실제 지역의 이름이다.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서쪽의 골짜기가 두문동이다. 이곳은 고려 말기 조선에 반대하여 벼슬살이를 거부한 고려 유신들이 은거해서 살던 곳이다. 
1392년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조선을 세우고 왕위에 오르자 고려의 유신 72인이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지조를 지킨다는 의미로 붙여진 부조현(不朝峴; 조회에 나가지 않는 고개)이라는 고개에서 조복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두문동으로 들어가 새 왕조에 출사하지 않았다. 충신은 두 임금을 모시지 않겠다는 충절의 뜻이었다. 조선 왕조는 두문동을 포위하고 72명의 고려 충신들을 몰살하였다고 전해진다. 태종 때 이곳 사람들이 과거에 응하지 않았으며 사회와 단절하고 은거해서 두문동이라 하였다. 중국의 <국어>와 <사기>에 문을 닫아걸고 나오지 않는다는 뜻의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있어 그렇게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집단적인 거부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_<두문불출(杜門不出), 조선으로 나가지 않겠다> 중에서

내가 옳으니 네가 그르니 하면서 말로 다투는 것을 ‘입씨름’이라고 한다. 현종 때 남인과 서인이 두 차례에 걸쳐 질긴 입씨름을 했다. 이를 예송논쟁이라고 한다. 
1차 예송은 1659년 효종이 죽자 그 어머니인 조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를 두고 벌어졌다. 서인은 효종이 조대비의 둘째 아들이므로 성리학의 예법에 따라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자가 정리한 ‘가정에서 지켜야 할 예법(주자 가례)’에는 장자가 죽었을 경우, 부모는 3년 동안 장례의 예를 갖춰야 하고, 차남 이하는 1년간 해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남인 허목·윤휴 등이 이의를 제기했다. 효종은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장자나 다름없으므로 3년(만 2년)으로 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결국 조대비가 상복을 입는 기간은 1년으로 결정되었고, 논쟁에서 승리한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았다. 
2차 예송은 1674년(현종 15) 효종의 아들이었던 현종이 임금이 된 후에 효종의 왕비였던 인선 왕후가 죽자 시어머니인 조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벌어졌다. 서인은 인선 왕후가 조대비의 둘째 며느리이므로 성리학의 예법에 따라 9개월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자 가례에는 첫째 며느리의 경우는 1년, 둘째 며느리에게는 9개월간 장례의 예를 치르도록 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반면 남인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효종이 둘째 아들이라도 임금이 되었으므로 장자로 대우해야 하며, 인선 왕후에게도 장자의 며느리에 해당하는 예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조대비가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논쟁에서 승리한 허목을 비롯한 남인과 이에 동조한 세력이 권력을 잡았다. 
상복을 얼마 동안 입느냐가 그토록 중요한 문제일까? 예송 논쟁은 겉으로는 장례의 예법에 대한 논란이지만 이 논쟁은 왕가도 일반 사람과 똑같은 예법을 적용하느냐, 왕위의 계승 원칙은 어떻게 정해야 하느냐는 등 현실 정치의 핵심적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기도 했다. 서인의 경우 왕권도 일반사대부와 동등하다고 여겼고, 신권을 강화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남인의 경우 왕권을 일반사대부의 예와 다르게 바라봤고, 왕권강화를 우선으로 삼았다. 
그런 의미에서 현종은 1차 기해예송에는 19세로 나이가 어렸고, 정권을 서인이 잡고 있어 서인의 주장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2차 갑인예송에서는 아버지 효종이 장자의 권위를 계승한 것이라고 판단하여 남인의 주장을 따라 1년을 채택했다. 그리고 1차 기해예송도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하여 서인을 몰아내고 남인을 기용하였다.
_<두 차례에 걸친 예송논쟁, 무엇을 위한 논쟁인가? > 중에서
조선의 제19대 국왕 숙종(1661∼1720, 재위: 1674∼1720)은 현종의 적장자로 왕위를 계승하는데 무난한 과정을 겪었다. 태어날 때부터 왕이 될 자격이 있는 원자가 되었고 당연한 순서로 세자로 책봉되었다. 숙종은 14살이란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렴청정 없이 바로 정치를 시작했다. 
숙종의 치세는 ‘환국(換局)’에서 시작해서 환국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환국은 왕이 조정의 대신들을 손바닥 뒤집듯이 전면적으로 교체하는 것을 말한다. 숙종은 붕당을 누르고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는데, 그 수단이 바로 환국이었다. 
환국정치를 주도했던 숙종대의 세 차례의 환국이 있었다. 그 해의 간지를 따라서 경신(1680, 숙종 6)·기사(1689, 숙종 15)·갑술환국(1694, 숙종 20)이다. 
가장 먼저 일어난 경신환국은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등용된 사건이었다. 숙종이 즉위했을 때 조정은 갑인예송에서 승리한 남인이 장악하고 있었다. 남인의 영수이자 영의정인 허적이 남인들을 모아 연회를 열었다. 하필 그날 비가 와서 숙종은 허적을 걱정해서 야외에서 쓰는 기름 먹인 천막을 신하에게 가져다주라고 했다. 그 천막은 원래 왕실의 행사에서만 사용하는 귀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심부름 간 신하가 돌아왔다. 허적이 왕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이미 천막을 가져간 상태였던 것이다. 숙종은 허적만 처벌한 것이 아니라 남인 전체를 몰아냈다. 조정은 서인의 세상이 된다. 공교롭게 국혼의 변화도 비슷한 때 일어났다. 그해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가 별세하자 이듬해 인현왕후를 계비로 맞았는데, 그녀 또한 대표적인 서인 가문 출신이었다.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고, 노론이 권력을 장악했다. 남인을 강력하게 몰아내자는 쪽이 나이가 많은 강경파였는데, 늙을 노(老) 자를 써서 노론이라 했다. 반면에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같이 가자는 쪽인 젊을 소(少) 자를 써서 소론이라고 했다. 
기사환국(1689)은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숙종은 왕비인 인현왕후와의 사이에서 7년 동안 자식이 없었다. 그 사이에 숙종의 마음을 빼앗은 여인이 바로 장희빈이다. 당시 소의였던 후궁 장씨가 마침내 1688년(숙종 14)에 왕자(뒤의 경종)를 출산한 것이다. 숙종을 아들을 얻었다는 기쁨에 이듬해 1월 그 왕자를 원자로 삼고 장씨를 희빈에 책봉한 것이다. 세자의 책봉은 국본, 즉 나라의 근본을 정하는 일이니 그 무게가 적지 않았다. 당연히 서인의 강력한 반대가 이어졌다. 무엇보다 희빈 장씨가 남인과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불안했던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그런 전례는 중국에도 없다면서 반대를 앞세웠다. 
숙종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가장 먼저 송시열의 관직을 삭탈하고 지방으로 쫓아버렸으며, 송시열이 그런 발언을 했는데도 그를 탄핵하지 않았다며 대간을 교체했다. 서인을 내쫓았으니 주요 관직을 남인으로 교체했다. 서인의 주요 인물은 사사되거나 처벌되었다. 기사환국으로 서인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서인의 사상적 근저가 되는 이이·성혼을 문묘에 축출하고, 송시열을 사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숙종은 중전 민씨를 서인(庶人)으로 폐출해 사가로 내보낸 뒤 희빈 장씨를 왕비로 삼고 종묘사직에 알렸다.
마지막 환국인 갑술환국(1694)은 숙종 중반에 일어났다. 남인은 기사환국으로 정권을 장악했지만, 이전처럼 무게감 있는 이들이 없어서인지 집권세력에 합당한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다. 무엇보다 거듭된 환국의 경험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국왕의 뜻에 순종하는 자세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갑술환국의 핵심적 요인도 정치적 쟁점이 아니라 결국 궁중의 문제였다. 당시 궁궐에는 새로운 변화가 있었는데, 숙원 최씨(뒤의 숙빈 최씨)가 책봉되어 숙종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사환국 때 중전이 된 장씨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갑술환국의 시작은 고변이었다. 중전 장씨의 오빠 장희재가 숙의 최씨(숙빈 최씨)를 독살하려고 했다는 내용이었다. 
앞서도 그랬던 것처럼 기사환국을 그대로 뒤집은 결과였다. 이이·성혼은 다시 문묘에 종사되었고, 김익훈·김석주·송시열 등이 복관되었다. 반대로 주요 남인은 관직에서 쫓겨나거나 처벌되었다. 환국이 일어나게 된 요인이 되었던 터라 중전의 교체도 즉각 이뤄졌다.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고, 민씨는 중전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숙의 최씨가 얼마 뒤 영조가 된 연잉군을 낳았다. 그 후 돌아온 인현왕후는 세상을 떠났고,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이유로 희빈 장씨는 사사되고 장희재는 처형되었다. 
세 차례의 환국을 거치면서 서인이나 남인에게는 권력보다는 상처만 남았다. 붕당 간의 견제와 균형도 무너졌다. 붕당정치의 가장 핵심인 공론정치는 유명무실해지고 숙종만이 강력한 왕권을 챙겼을 뿐이었다. 숙종은 명분으로는 탕평을 외쳤지만, 결과적으로는 편당이 되고 말았다. 
_<환국의 정치로 왕권강화를 노린 숙종> 중에서 

목차

프롤로그

Ⅰ. 키워드로 본 한국사
-홍익인간(弘益人間), 한국의 기본 사상
-무접무향(無蝶無香), 나비가 없다고 향기가 없을까?
-견훤지말(甄萱之末), 견훤의 꿈
-나는 미륵이다, 궁예의 관심법
-삼촌설격퇴적(三寸舌擊退敵), 세 치 혀로 적을 물리치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느냐, 만적의 난
-당금여석(當金如石), 황금 보기를 당연히 돌같이 하라
-두문불출(杜門不出), 조선으로 나가지 않겠다
-함흥차사(咸興差使), 부자지간의 불화
-흥청망청(興淸亡請), 연산군의 몰락 
-송도삼절(松都三絶), 개성의 인물
-주초위왕(走肖爲王), 벌레의 힘을 빌려 적을 공격한다
-정명가도(征明假道), 조선을 길로 내달라니!
-물언아사(勿言我死), 내 죽음을 알리지 마라
-삼일천하(三日天下), 너무나 짧았던 꿈
-못 살겠다 갈아 보자! 선거 구호의 표본

Ⅱ. 쟁점으로 본 한국사 
-신라는 어떻게 최후의 승자로 남게 되었는가?
-발해를 우리 역사에 포함시킬 수 있는가?
-인조반정, 성공한 반정이라서 정당한가?
-누구를 위한 북벌인가? 
-두 차례에 걸친 예송논쟁, 무엇을 위한 논쟁인가? 
-그들만의 리그, 붕당
-실학은 개혁적인 학문인가? 
-흥선대원군의 개혁을 다시 생각하다
-신탁 통치, 그것이 문제로다!
-제 1공화국의 임시정부 법통론은 정당한가? 

Ⅲ. 사건으로 본 한국사
-동아시아 두 강국, 고구려와 수나라의 결전
-왕이 되려고 했던 문벌귀족 이자겸의 난 
-고려인의 자주의식, 서경 천도 운동 
-권력의 물줄기를 바꾼 고려 무신정변 
-몽골의 침입과 항전
-조선 건국의 신호탄, 위화도 회군
-조선 최대의 전쟁, 임진왜란
-병자호란, 굴욕을 안겨준 전쟁
-불평등조약의 대명사, 강화도 조약
-개화파와 수구파의 격돌, 임오군란 
-갑오농민운동, 아래로부터 개혁을 실현하다 
-대한독립만세, 3.1운동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
-민주주의는 아래로부터, 민주화운동

Ⅳ. 문화유산으로 본 한국사
-옛 사람들의 영원한 휴식처, 고인돌
-불교의 나라를 위한 꿈, 불국사와 석굴암 
-한국의 탑은 왜 홀수 층일까?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나라를 구했을까?
-우리 역사의 보물 창고이자 쓰라린 역사의 현장, 강화도 
-배흘림기둥이 아름다운 부석사 무량수전 
-고려 예술의 걸작 상감 청자
-조선 왕조의 역사, 종묘
-정조의 꿈이 담긴 신도시, 수원화성
-조선의 정궁, 경복궁 

Ⅴ. 인물로 본 한국사
-단군은 하늘의 자손인가? 
-활 잘 쏘는 주몽 고구려를 세우다 
-따뜻한 왕조를 건설한 온조 
-알에서 깨어나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 
-강한 백제를 만든 근초고왕
-고구려의 가장 위대한 왕, 광개토대왕
-순수비로 보여준 통일 의지, 진흥왕 
-7세기 삼국의 두 축, 연개소문 vs 김춘추 
-황산벌 대혈투 계백 vs 김유신
-장보고, 바다를 접수하다
-신라 최고의 천재 최치원 골품제에 무너지다
-나라를 위해 결혼정책을 펼친 태조 왕건
-고려를 구한 영웅 강감찬 
-여진 정벌의 영웅 윤관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태종 이방원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세종
-조선 중기 철학의 양대 산맥, 이황 vs 이이
-조선 최고의 문제적 지식인 허균
-송시열, 조선 제일의 문제적 인물 
-환국의 정치로 왕권강화를 노린 숙종
-부강한 조선을 꿈꾼 북학파 박제가 
-유배지에서 꽃 피운 실학, 다산 정약용

Ⅵ. 역사 속의 ‘책’
-삼국의 흥망성쇠가 들어있는 삼국사기
-이야기가 있는 역사, 삼국유사
-조선 최고의 법전, 경국대전
-세계가 인정한 보물, 조선왕조실록 
-한글창제의 원리를 밝힌 훈민정음해례본
-동양의학의 백과사전, 동의보감
-실학의 문을 연 개혁교과서, 반계수록 
-인문과 지리의 총판, 택리지
-조선 대문호의 걸작, 열하일기
-불순한 의도, 조선책략 

Ⅶ. 개혁군주, 그리고 개혁을 꿈꾼 인물
-고구려의 복지제도인 진대법을 실시한 고국천왕과 을파소
-원효와 의상, 누가 더 개혁적이었을까? 
-고려 광종, 개혁군주인가? 피의 군주인가?
-지눌, 고려 불교를 개혁하다 
-공민왕의 개혁과 신돈
-조선 건국을 설계한 정도전
-조광조, 급진적인 개혁에 꺾이다
-광해군, 조선시대 최고의 외교정책가
-영조의 탕탕평평
-정조의 개혁 정치 
-홍경래는 왜 봉기했나? 
-개화사상의 아버지 박규수의 선택은?
-신채호, 역사로 개혁을 말하다

참고문헌

작가소개 
박경남은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으며, 「한겨레21」 독자편집위원 등 자유기고가로 활동했다. 현재 서울디지털창작집단 부대표를 맡고 있으며, 고전 읽기와 글쓰기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월간지 「엄마는 생각쟁이」에 칼럼을 기고하는 등 논픽션 작가로 다양한 글들을 선보이고 있다. 저서로는 『소설 징비록』, 『논어힐링: 공자가 생각한 말』, 『착한리더의 생각』, 『그 남자 조선 왕』, 『부모된 후 15년』, 『큰 인물로 키우려면 맘껏 뛰어 놀게 하라』, 『우리는 당당한 꼴찌다』(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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